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 통신사 (문단 편집) == 여정 == || [[파일:cbo4ij000001rnuv.jpg]] || || 에도가 끝이 아니고 [[닛코]]까지 이어지는 것은, 그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이 있었기 때문으로 4~6대 통신사가 이곳을 방문했다. || 통신사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거리만 왕복 4,000km에 달하는데다 일정에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껴있으면 시간이 더 걸렸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부산까지 가는 도중에 충주, 안동, 경주 등을 거치며 전별연(餞別宴)을 받았고 격졸(格卒), 기수(旗手), 노자(奴子) 등 사행에 필요한 인원을 합류시켰다.[* 폐단이 커 중간에서 하는 전별연은 10대 통신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부산에 도착해도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길일(吉日)을 정해 출발하였으며 또한 무사히 갔다오길 바라며 부산 영가대(永嘉臺)[* 현재 [[범일동]]에 영가대가 있는데, 200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는 그 뒤의 성남초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철거되었다. 현재는 영가대 본터 자리에 축소한 영가대 모형과 비석이 있다. 지금은 현 영가대든, 옛 영가대든 도심지에 있고 바다에서 꽤 멀어 상상이 안가지만 예전에는 주변이 모두 바다였다.]에서 용왕에게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일본까지 타고 갈 배는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이 기선 3척과 복선 3척, 총 6척을 제작했으며 삼사(三使)를 구성하는 종사, 부사, 종사관이 각각 기선 1척씩을 나눠 타고 복선 3척에는 짐을 실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날씨와 바다가 도와줘야 출항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10대 통신사는 1747년 11월 28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한양을 떠났는데 부산에 도착한 후인 1748년 1월 9일에는 해신제까지 지냈지만 풍향이 맞지 않아 이를 기다리다 2월 16일에서야 대마도로 출항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통신사의 총인원은 475명이었는데 이들이 부산에 갑자기 오래 머무는 바람에 먹을 음식물을 대기 위해 부산 주변 고을들이 피폐해져 몇 년간 회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산을 떠날 때는 대마도주가 보내온 배를 따라 갔는데 풍향에 따라 [[쓰시마섬|대마도]]의 좌수포(佐須浦, 사스우라) 또는 악포(鰐浦, 와니우라)에 입항하였다. 그 후 바람이 잘 불어주기를 기다렸다가 대마도 해안을 시계 방향으로 따라 돌면서 내려가 최종적으로 대마도주가 있는 부중포(府中浦,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영접을 받았다. 이때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통신사가 대마도에 온 시점부터 에도로의 여정, 쇼군 알현,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통신사 일행과 함께 하면서 안내를 맡았다. 그 후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키섬]],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 내해]]로 진입하는데 여기서부터 지나가는 지역의 번주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로를 따라 [[오사카]]의 정포(淀浦, 요도우라)까지 가 배를 남겨두고 육로로 [[교토]]로 간 후 에도까지의 여정을 이어나갔다. 교토부터는 막부가 만든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특별한 길로 행차하였으며 에도에 도착하면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 교토에 있는 히가시혼간지가 아님.]에서 머물렀다.[* 1~7대까지는 시바(芝)의 혼세이지(本誓寺)에 머물렀는데 화재로 소실되면서 8~11대에는 히가시혼간지가 숙소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인 12대는 에도까지 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항해 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아직 엔진이나 증기 기관이 아니라 돛과 노를 썼으니 당연하지만 파도가 높거나 역풍이 부는 날에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행록을 보면 몇 날 며칠 동안 같은 마을에 머무니 답답하다는 구절이 많이 보이며, 이 정도면 갈 만하지 않느냐는 통신사 측과 충분히 위험하니 내일 떠나자는 대마도 측의 언쟁도 적잖게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역대 통신사들의 사행록에서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까지 가는 날의 기록을 읽어보면 물살이 심히 높아 배에 탄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난리를 쳤다는 부분이 자주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탄 배가 파손되거나,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다른 항구에 잠시 정박하거나, 배들 가운데 한 척이 부산으로 다시 떠밀려가 먼저 대마도에 도착한 일행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 실제로 1703년의 문위행(問慰行, 대마도주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은 대마도 근처에서 좌초해 112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1766년의 문위행은 부산 앞바다에서 좌초해 103명 중 93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히타카츠]]에 있는 한국전망대에는 1703년의 사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있다.] 도중에 [[왜구]]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소 긴의 배에 탄 여러 사람들이 ‘그들은 [[해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돛을 멈추고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돌려보내 호송선을 부르도록 한 다음 [[갑옷]]을 입고 [[활]]을 잡았다… 나도 갑옷을 입고 호송선을 기다렸다.” (책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저) [[https://www.huffingtonpost.kr/2016/12/26/story_n_13780142.html|조선통신사가 본 중세 일본의 기상천외한 풍습 3가지]]]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1682년 통신사행의 종사관 자리를 예로 들면 본래 이언강이 임명되었으나 4품직으로 승진했다는 이유로 부사로 다시 임명되고 종사관에는 박치도가 임명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박치도에게 지병이 있다는 이유로 임영으로 교체. 임영은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엽으로 교체. 그리고 신엽은 코피가 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박경준으로 바뀌었다. 한편 생명의 위협(?)은 오히려 삼사(三使)보다는 하인이나 격군 등 낮은 신분이 더 많이 느꼈을 것이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보면 누가 죽었으니 안됐다는 식의 기록이 가끔 발견되며, 사행 도중에 죽은 사람은 어떻게 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식의 규정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있었다.] 실제로 항해 도중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10대 통신사는 1748년 2월 16일 부산을 떠나 대마도의 악포(와니우라)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던 중 2월 21일, 부사 남태기가 탄 배에 불이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2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쇼군에게 보내는 예물 일부가 불에 탔는데 문제는 불에 타버린 예물 중 하필 인삼 70근이 있었다는 것. 예로부터 인삼은 매우 귀한 것이라 보고를 받은 영조도 걱정이 되어 3월 1일, 조정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영조가 다시 보낼 인삼이 있는지 묻자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가장 먼저 영의정은 가을이나 되어야 수확이 가능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의견을 냈다. 호조판서는 보관하고 있는 인삼이 10근밖에 없는데다 다시 구한다 해도 원래 보낼 분량인 70근을 맞추기 힘들테니 대신 다른 것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는데 좌의정은 다른 것을 보냈다가 일본에서 안받으면 국가 망신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에 [[박문수]]는 일본에 보낼 예물은 반드시 충당해야 하는 것이니 일단 구해볼 수 있는만큼 구해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가을 수확시기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을 내는데 대부분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인삼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삼이 불에 탔다고 해서 인삼을 못구한 채 사신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은 국가의 체면이 달린 일이니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자는 의견으로 취합된다. 며칠 후 인삼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봤더니 인삼은 꽤 있는데 나라에서 인삼을 살 때 시가를 쳐주지 않다보니 안 팔고 숨기는 거라며 제값을 주고 사서 보내자는 좌의정의 의견에 따라 인삼을 사서 보내게 된다. 한편 일본에 있던 통신사는 5월 21일, 에도에 도착했는데 막부에서는 5월 27일을 쇼군 알현 일정으로 전달했다. 그러자 통신사들이 다시 보낸 인삼이 아직 안왔는데 어쩌냐고 하자 처음에는 날짜를 못바꾸겠다고 하다 그러면 며칠 미뤄주겠다 하여 6월 1일로 날짜를 바꾼다. 그 후 조선에서 다시 보낸 인삼이 도착하여 6월 1일, 예정대로 통신사들은 쇼군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 1763년 통신사행에 서기로 파견된 원중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원래 일본에 갈 뜻이 없었다가 통신 부사로 임명된 자가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해 지원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부사가 교체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인 '승사록' 에는 원래 가지 않으려 했는데 '문득 하늘 끝을 살피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했다고 되어 있다.]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는 길일을 정하여 방문 일정을 통보하는데 그때까지 통신사는 숙소에 머물며 대기하였다. 일정이 정해지면 통신사는 국서와 예물 리스트를 가지고 [[에도 성]]에 입성하여 각지에서 온 다이묘와 신하들이 도열한 [[혼마루]]의 연회장에 가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그 후 쇼군은 통신사와 면담하면서 국서를 확인하고 조선에서 가져온 예물을 살펴본 다음 통신사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일정이 끝난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를 받을 때까지 에도에서 기다리며 다이묘나 로주들과 어울리다 답서와 조선으로 가지고 갈 예물이 나오면 그간 어울렸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마도주와 함께 귀로에 올랐다.[* 이와 별개로 막부는 먼 길을 온 통신사에게도 따로 하사품을 챙겨주었다.] 그 후 한양에 도착해 임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이 끝났다. 보통온 이런 일정이지만 1636년의 4대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닛코 동조궁]]에 처음 방문하였고 1643년, 1655년에 파견된 5, 6대 통신사들은 참배까지 하고 돌아갔다. 통신사는 일본에 있는 내내 융숭한 접대를 받았는데, 실제로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ㅁㅁ에서 묵었다. ...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사치스러운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라는 식의 기록을 무척 많이 접할 수 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센코쿠 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 통신사의 서예 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고,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일본 측의 요청을 다 들어주기가 대단히 힘들었다거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는 식의 기록이 곳곳에 있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거나 일이 너무 힘들다고 울기도 했다고도 쓰여 있다. 그나마도 통신사에게 글이나 그림을 요구하는 일을 도중에서 독점하며 이득을 챙기려는 대마도주가 통제한 것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통신사 일행과의 접견으로 중국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막부는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통신사가 거쳐가는 번으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의례로 이들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통신사 일행을 한번 맞이하는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도 한다. 초기(17세기)에는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 냥'''이나 되었는데 이 당시 '''막부의 1년 수입은 76만~77만 냥에 불과'''했다.[*출처 <일본근세사>, 이계황, 116쪽] 그러다보니 통신사의 경로에 있는 번에서는 접대를 하느라 거액의 비용을 쓸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 번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 문제가 현실화한 것이 1711년([[숙종(조선)|숙종]] 37년)의 8대 통신사때이다. 당시 일본의 유력한 대신이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이에노부가 코후의 번주이던 시절부터 그를 섬기다 이에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해 하쿠세키가 올리는 개혁안을 이에노부도 대부분 신임하면서 로주(老中)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이에노부와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츠구]]까지 대를 걸쳐 하쿠세키의 정치력이 발휘되는데 이 시기를 당시 연호를 따 '''정덕의 치'''(正德之治, 쇼토쿠노치, 쇼토쿠의 치)라고 부른다.]는 일본이 통신사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데다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맞이하는 각종 의례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문제는 이것이 조선에는 통보하지 않고 마음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 통신사는 갑작스럽게 의례를 변경할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박했으나 결국 적잖게 타협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는데, 이 때문에 조선에 돌아와 '왕명을 욕되게 했다' 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의 의례 개변은 일본 내에서도 지나치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마침 이듬해인 1712년에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면서 아라이 하쿠세키도 실각하자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례는 대부분 이전의 것으로 복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교환하던 국서에서 쇼군의 칭호 문제인데 1636년 이후로 조선은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 대군(大君)'으로 칭하였으나 이때는 하쿠세키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본국왕으로 칭호를 바꾸었다. 이 칭호 역시 이후로는 다시 일본국 대군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1714년에 파견된 류큐 하경사에게도 일본 측은 귀국(貴國), 일본국 대군, 태청(台聽) 등의 단어가 건방지다고 새로 써서 오라고 따졌는데, 조선 측에 국서를 고칠 것을 요구할 때는 통신사들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문제제기를 했으나 류큐 사절단은 만만하게 봤는지 이들이 에도에 오자 일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어쨌든 사행이 거듭되면서 소요되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인 12대 통신사의 사행 당시에는 아예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간략화되었다. 통신사는 귀국 후 사행에 대한 기록이자 견문록인 사행록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제3자의 자료로서 일본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명이나 청을 주제로 통신사와 일본 측 인사가 주고받은 대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현존하는 통신사의 사행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초대 통신사 방문때 부사였던 경섬(慶暹)이 쓴 해사록(海槎錄)이다. 다만 통신사 이전에도 일본을 다녀온 사절단들은 꽤 많았으므로 이들의 사행록도 꽤나 남아있는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사행록은 의외로 [[정몽주]]의 정포은봉사시작(鄭圃隱奉使時作)이다. 정몽주의 경우 1377년 9월부터 1378년 7월까지의 사행 기록을 남겼는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협조를 얻으려 다녀왔다[* 다만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일기라든가 산문이 아니라 시. 그것도 몇 편 정도이기 때문에, 고려 시대의 기록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정몽주의 사행에 대해 상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의 통신사들도 충신으로 이름이 높은 정몽주가 다녀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서 정몽주가 파견되어 왔던 곳 주변을 지나갈 때 남긴 일기에 으레 그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그의 시를 활용해서 시를 짓거나 "정몽주의 시에 이러이러한 구절이 있는데, 와서 보니 이러이러한 모습을 쓴 것인 모양이다"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1420년에 일본을 다녀온 송희경(宋希璟)의 일본행록(日本行錄)이 가장 이르고 1443년에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쓴 사행록 신고령봉사시작(申高靈奉使時作)과 그보다 뒤인 1471년에 [[성종(조선)|성종]]의 명으로 쓴 견문록 형태의 [[해동제국기]]도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던 [[김성일(조선)|김성일]]도 해사록(海槎錄)이라는 사행록을 남겼다. 후에 10대 통신사의 정사였던 [[홍계희]]가 이전에 발간된 사행록들을 수집해 [[해행총재]]라는 책을 냈다. 전해지는 사행록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내용이나 성격이 갈리는데 왜란 전에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아직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여정 중에 받은 개인적인 감상이나 경험 등을 시의 형태로 남긴 것이 대부분인 반면, 왜란 이후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주로 보고나 정보 수집이 중요했기 때문에 견문록의 양식으로 사행록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